경남 FC 김주영 인터뷰
2023-08-09
이 남자가 돌아왔다. 올 시즌 K리그가 한창 진행되고 있지만 이제
막 뒤늦은 개막전을 준비하는 이가 돌아왔다. 무릎 전방 십자인대 파
열이라는 큰 부상으로 6개월 넘게 재활에만 매달려왔던 경남 수비의
핵 김주영이 드디어 독일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. 어렵게 잡은
대표팀의 기회를 놓치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재기의 칼날
을 간 김주영을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봤다.
반갑다. 오래 기다렸다. 요새 몸 상태는 어떤가.
나도 반갑다. 아직 몸 상태는 완벽하지 않다. 독일에서 재활에만 매
달린 탓에 부상 회복 속도는 빠르지만 너무 조금하게 생각하지 않으
려 한다. 7~8월이 되면 컨디션을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.
유럽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재활을 했다. 축구의 본고장 유럽에 있
었는데 혹시 박지성을 아는가.
당연히 안다. 정말 위대한 선수라고 생각한다.
오, 그런가. 당신은 비록 부상으로 낙마했지만 대표팀 유니폼도 입었
었다. 박지성의 플레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.
그 분은 최고의 축구선수다. 환상적인 플레이를 펼친다. 존경할 만
한 선배다.
다음 질문이다. 당신은 수비 치고 무척 빠른 발을 가졌다. 시종일관
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이 인상적이다. 그런 의미에서 박지성의 별
명 ‘산소탱크’를 어떻게 생각하나.
^^
미안하다. <경남 김주영, “박지성은 존경할 만한 선배”> 기사 하
나 나왔다. 이제 당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. 일단 당신의 축구 이야
기부터 들어보고 싶다. 원래 육상 선수였다고 들었다.
초등학교 때 무척 빨랐다. 학교에서는 적수가 없었다. 구대회에 나갔
는데 당시 초등학생은 100m가 아니라 80m를 달렸다. 여기에서 엄청
난 차이로 1등을 했다. 내가 마이클 존슨인 줄 알았다.
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기 시작했고 상도 주니 신이 난 것도 이때부
터였고 공부를 못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. 아니 초등학교 4학
년 산수가 뭐 그리 어렵나. 그런데 구대표로 서울시 대회에 나갔는
데 거기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. 80m 결승에서 3등을 했고 주위에
서 축하를 많이 보내줬지만 나는 그게 아니었다. 당시 165cm의 키에
거의 흑인처럼 까만 피부였던 신방학초등학교 녀석을 아직도 기억한
다. 나보다 빠른 애가 있다는 사실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. 그
때 일찌감치 육상은 포기했지만 지금도 100m는 11초에 주파한다.
그런데 보통 발이 빠르면 공격수를 시키지 않나. 당신도 처음에는 공
격수로 축구에 입문했나.
그렇다. 초등학교 때 브라질에 유학을 가 처음으로 축구를 시작했는
데 그때는 내가 달리면 아무도 막을 수비수가 없었다. 그러다가 한국
으로 돌아와 용인축구센터에서 테스트를 받았다. 당시 상급학교로 진
학하게 될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3학년 학생을 뽑는 시기였는데
이미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선발 대상이 아니었다. 하지만 용인축
구센터가 유망하다는 이야기에 아버지를 따라 일단 테스트부터 받기
로 했다. 그러던 중 거기 한 분이 나를 눈여겨보셨고 수비수로 전향
을 권하셨다.
자세히 이야기 해 달라.
테스트를 앞두고 한 분이 “너 수비 본 적 있어? 일단 수비 한 번 해
보라”고 하셨다. 그때까지 수비수로 뛰어본 적이 없는데 그냥 시키
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연습경기가 끝나자 그 분이 “아버지를 모
시고 오라”고 하셨다. 그 분이 아버지께 “얘는 포지션 바꿔야한
다. 원래 얘 나이 학생은 뽑지 않는데 포지션 바꾸면 받아주겠다”
고 했다. 나한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. 내가 이미 또래 축구계에
서는 호날두인데 수비를 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. 그런데 아버
지 생각은 달랐다. “일단 무조건 여기에 들어가야 한다”면서 “수
비 한다고 하고 들어가서 공격하는 모습 보여주면 된다”고 하셨다.
나에게 수비수 전향을 권하신 그 분은 이런 말을 했다. “얘는 공격
수 계속 하면 대학도 못 간다. 그런데 수비수하면 국가대표까지 할
수 있다.” 이 매의 눈을 가진 분이 누군지 궁금하실 것이다. 바로
허정무 감독님이었다.
놀랍다. 역시 ‘허카우터’라는 별명이 그냥 나온 게 아닌 모양이
다. 그런데 또 놀라운 사실은 당신이 고등학교 시절 호주로 축구 유
학을 떠났다는 점이다. 보통 유럽으로 많이 나가는데 특별히 호주를
선택한 이유가 있었나.
중학교 3학년 때 사춘기가 제대로 왔다. 또래 친구들이 오토바이 타
고 다니고 그럴 때 나는 그런 짓은 안 했고 딱 하나만 했다. 그게 바
로 리니지였다. 정말 축구보다 리니지를 열심히 했다. ‘현질’도
꽤 했다. 운동 시간 빼고는 리니지에만 빠져 있었다. 그런데 아버지
가 그걸 아시고는 ‘쿨하게’ PC방 정액권을 끊어주셨다. 아버지가
나를 풀어주면 정신 차리고 그만둘 줄 알았던 것이다. 하지만 나는
“이게 웬 떡인가” 싶어서 더 열심히 리니지만 했다. 방황을 많이
하던 시기였는데 중학교 때만 축구를 한 50번 정도 그만둔 것 같다.
나중에 커서 PC방 차리면 된다고 생각했다. 아버지께서 결국에는 내
가 한국에 있으면 절대 정신 못 차릴 걸 알고 호주에 있는 김판근 축
구교실로 보내버리셨다.
아버지께서 고민이 많으셨던 모양이다.
누나가 한 명 있는데 누나는 천재다. 지금은 MBA 과정을 준비하고 있
다. 어머니가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고 아버지도 참 머리가 좋다. 그
런데 누나가 그 재능을 다 가져간 것 같다. 어릴 적 누나와 똑같이
재능, 눈높이, 구몬 다 해봤는데 나는 누나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.
거기에다가 리니지까지 접했으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했겠
나. 호주가서 꼭 축구를 할 생각이 없으면 영어라도 배워오라고 하셨
다.
이거 말 잘못 했다가는 예전 고종수처럼 될 수도 있다. 고종수는 리
니지 발언 한 번으로 아직도 오해를 받고 있다. 그 이후로는 리니지
를 끊었나.
호주에 가서 하고 싶어도 못했다. 거기는 인터넷 환경이 좋지 않아
서 속도가 엄청 느리고 자주 끊긴다. 리니지 했다가 아이템 다 떨굴
까봐 못했다. 그러면서 자연스레 리니지를 접었고 이제는 손도 대지
않는다. 아버지가 정말 현명하셨다. 지금의 내가 있는 건 다 부모님
덕분이다.
리니지를 끊었다니 다행이다.
무슨 소리…. 호주에 가서 FM을 시작했다.
저런…. 최악이다.
어디 하나에 빠지면 정신을 못 차리는 스타일이다. 호주에 처음 가
랭기지 스쿨에 다녔는데 이미 영어를 조금을 할 줄 알아서 별로 공부
할 게 없었다. 그때 한 선배가 FM 하는 모습을 봤다. ‘뭐 저런 바둑
판이나 쳐다보고 있느냐’고 무시했는데 몇 번 해보니 이거 신세계
를 만난 느낌이었다. 호주에서 신나게 FM으로 시간을 보냈다.
나도 그 기분을 잘 안다. 그런데 리니지에 이어 FM이라니 이거 참 뭐
라고 위로를 해야할지 모르겠다.
그러다가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인 11학년이 되니 일반 고
등학교에서 영어로 수업을 해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. 과제도 엄청
많고 아침 8시 반에 학교에 가 오후 4시까지 공부를 한 뒤 죽어라 뛰
어 한국인 빌리지에 있는 훈련장에 가야했다. 운동이 4시에 시작인
데 기구 준비해서 나오면 4시 반이었고 몸도 제대로 못 풀고 기온은
40도에 육박하고 미치는 줄 알았다. 축구 좀 해보려고 정신차렸더니
같이 뛰는 기성용은 청소년대표 가 있고 나는 FM만 하고 있는 상황이
었다. 인터넷 들어가보면 네티즌들이 ‘기성용 포텐이 터지네 마네’
하고 있는데 내 현실은 시궁창이었다. 그때 또 한국에 있는 여자 친
구가 이별을 통보했다. 남자 생긴 냄새가 났지만 물증이 없어 의심
만 하고 있다가 몰래 미니홈피에 들어가 봤더니 일촌명에 ‘시크릿’
이라고 있더라. 젠장, 양다리였다. 바로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한국
에 들어가야겠다고 말했다. 그리고 일주일 뒤에 표 끊고 돌아왔다.
그게 뭔가. 호주에 가서 어떤 희망을 안고 돌아올 줄 알았는데 거기
에서 유학 생활 끝난 건가. 마음 잡고 그런 거 없었나.
내 호주 유학 생활은 거기에서 끝이다.
리니지 때문에 호주 갔다가 영어 좀 배우고 FM하다가 여자 친구 문제
로 돌아온 게 전부인가.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방황했나.
호주에서 배운 게 없는 건 아니다. 당시 김판근 축구교실 멤버가 잉
글랜드로 잠깐 축구 캠프를 간 적이 있었다. 거기에서 엄청난 충격
을 받았다. 맨유와 아스널 유소년을 완파하고 리그 무패 우승을 차지
한 블랙번 U-17 팀과 경기를 했는데 이놈들 정말 미친 듯이 잘하더
라. 난 내 스피드를 믿었는데 흑인 선수와 대결에서 꽁무니만 쫓아다
녔다. (기)성용이는 자책골 넣고 난리도 아니었다. 0-6으로 깨지고
생각이 많아졌다. 사실 여자 친구 문제도 있었지만 호주에서 축구도
못하고 공부도 못하는데 그거 두 개를 다 벅차게 쫓고 있는 내 자신
을 보면서 “이러다 죽도 밥도 안 된다”고 생각했다. 한국에 돌아
가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었다.
그래서 신갈고등학교에 가게 된 것인가.
그렇다. 이제 게임도 지겨웠고 여자 문제로 고민하는 것도 싫었다.
블랙번 유소년에서 패한 뒤 나도 축구를 잘해보고 싶었다. 신갈고등
학교에 가니 후배지만 대단한 선수들이 많았다. 거기에서 절치부심했
다. 한 학년 어린 이승렬, 김보경, 박준태, 김다빈 등 내가 백암중 3
학년 때 원삼중 2학년이던 친구들이 다 신갈고로 왔다. 당시 얘네들
은 고등학교 레벨이 아니었다. 이승렬이나 김보경은 뭐 꾸준히 잘했
고 그때는 특히 지금 인천에서 뛰고 있는 박준태가 날아다녔다. 내
가 본 애 중에 걔는 정말 최고다. 아무도 못 막는다. 도저히 있을 수
가 없는 애다. 후반전에 들어와서 두 골 넣고 게임 끝내는데 뭐 어떻
게 설명할 길이 없다. 그런데 막상 내 현실은 별로였다. 걔네가 잘하
는 거지 내가 잘하는 게 아니지 않나.
에이, 결국에는 축구 명문인 연세대학교 입학해 놓고 너무 겸손한
거 아닌가.
내가 무척 존경하는 당시 백암